식물이 살려준 이야기
스물여섯 번째 생일 아침, 내가 깨어난 곳은 병원 백색 천장이었다. "스트레스성 심장 조기 수축"이라는 진단명이 공기 중에 맴돌았다. 의사가 건넨 처방전에는 낯선 단어가 줄을 이었다. "자연 노출 요법". 도시 한복판 15평 원룸에서 콘크리트만 바라보던 나에게, 그 말은 우스꽝스러운 조롱처럼 느껴졌다.
1. 죽음으로 시작된 정원
첫 번째 식물은 3일 만에 시들었다. 다육이 '초록이'였다. "물을 많이 주세요"라는 꽃집 사장님 말을 철저히 따랐는데도 줄기가 썩어 내려갔다. 두 번째 허브 '로즈마리'는 햇빛을 탐해 베란다 끝에 두었더니 그만 태양에 타버렸다. 다섯 번째 장미 '핑키'가 죽었을 때, 나는 화분 앞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식물도 살리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사람을 돌보겠는가?
식물 살인범의 반성일지
과잉 보살핌이 독이 됨 (물 주기 3일 → 10일 주기로 교정)
식물도 개성이 있음을 깨달음 (선인장은 외로움을 좋아함)
죽은 잎사귀가 새싹의 밑거름이 되는 순환 발견
2. 뿌리내림의 철학
스물일곱 번째 식물 '포투스'가 기적처럼 자라기 시작했다. 창문도 없는 화장실 벽을 타고 줄기가 뻗어나갔다. 식물학자가 쓴 책을 펼치니 이런 구절이 있었다. "식물은 빛의 1%만으로도 광합성을 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본능적으로 생명의 가능성을 감지한다"
베란다에 작은 정원을 꾸리기 시작한 지 100일째, 뜻밖의 변화들이 피어올랐다:
새벽 5시 30분, 자동 관수 시스템 소리에 눈 뜨기 → 알람 시계 퇴출
흙을 만지며 커피 마시는 아침 의식 → 10년 묵은 우울증 약 대체
식물 이름표에 적힌 물주기 날짜가 주말 개념을 되살림
3. 녹색이 치료한 것들
1) 시간성 회복
마트에서 가져온 상추 뿌리를 물병에 꽂았다. 3일 후 하얀 뿌리가 돋고, 15일째 첫 잎이 펼쳐졌다. 스마트폰 속 초스피드 세상에 길들여진 뇌리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자연의 템포가 내 몸의 시계를 재설정했다.
2) 소유의 변혁
화분 30개가 채워진 베란다는 이제 내 성전이었다. 백화점에서 핸드백을 사려던 손이 자동으로 화분을 향했다. "이것을 키우면 3개월 후 열매가 열릴 거야"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3) 죽음의 재해석
겨울을 넘지 못한 바질에게 작은 장례식을 했다. 흙을 정성스럽게 털어내며 깨달았다. "모든 생명은 제 자리에서 태어나 제 시간에 떠나는구나" 그날부터 아버지의 장기 이식 실패로 가슴에 품었던 죄책감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4. 콘크리트 정글의 생명지도
식물이 가르쳐준 서울 속 비밀 정원들:
지하철 7호선 장암역 : 계단 천장을 뚫고 자란 야생 포도나무
강남 한복판 주차장 벽 : 20년간 암벽을 타간 담쟁이넝쿨
아파트 단지 쓰레기장 옆 : 누군가 버린 난초에서 새순이 돋아난 화분
이 도시는 죽지 않았다. 단지 우리가 보지 않았을 뿐이었다.
5. 당신의 창가에 피울 생명
초보자를 위한 생존 가이드
죽음 허가증 : 식물 3개 중 1개는 죽을 수 있음을 인정하기
배신자 선택 : 스파티필름, 산세베리아, 포투스처럼 배신 안 하는 식물로 시작
흙 체험 : 화분에 손 넣고 흙 만지기 → 코르티솔 수치 17% 감소 (서울대 연구)
이름 작명식 : '둥이'라 부르면 생존률 40% 상승 (일본 조사)
실패 축제 : 죽은 식잎으로 압화 만들어 일기장에 붙이기
6. 뿌리 내리는 자의 승리
어제 딸이 학교에서 가져온 콩나물 화분을 받았다. "엄마처럼 식물 박사 되고 싶어!" 햇빛이 스치는 베란다에서 우리는 새싹에 손을 얹고 약속했다. "네가 자라는 걸 지켜볼게."
그 순간 문득 떠올랐다. 1년 전 병원 침대에서 죽음을 생각했던 그 여자가, 지금 생명의 기적을 일구고 있다는 사실이. 화분 속 싹이 고개를 들어 햇살을 맞이했다. 작은 생명체가 내게 속삭이는 듯했다.
"네 안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아직 피어나길 기다리고 있어"
베란다 정원은 이제 내 두 번째 심장이다. 매일 아침 잎새에 맺힌 이슬을 보며 나는 중얼거린다. 생명은 가장 척박한 곳에서도 뿌리내리는 법이라고. 창밖에 메마른 콘크리트 숲이 보여도 이제는 두렵지 않다. 내 안에 푸르름을 키우는 비밀을 알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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